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4.3% 아래로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투자 스터디 모임에서 이 얘기가 나왔을 때 저도 솔직히 뭔가 묵직한 게 가슴을 눌러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단순히 금리가 높다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의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절사평균으로 물가를 읽는 워시의 셈법
차기 연준 의장 유력 후보인 케빈 워시가 청문회에서 꺼낸 단어 중 저를 가장 오래 붙잡아둔 건 '절사평균(trimmed mean)'이었습니다. 여기서 절사평균이란 데이터 분포의 양 극단값, 즉 급등하거나 급락한 항목들을 잘라내고 중간값만으로 물가 수준을 측정하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일시적으로 튄 숫자에 흔들리지 말고 바닥에 깔린 인플레이션의 흐름만 보겠다는 뜻입니다.
이 발상이 흥미로웠던 건, 1990년대 앨런 그린스펀이 연준 의장을 맡으면서 썼던 접근법과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린스펀은 물가 상승 신호가 몇 개 나타나더라도 그게 기술 혁명에 따른 생산성 향상의 결과라면 기저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이라고 판단하고 금리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1990년대 미국의 성장 사이클이 훨씬 길게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워시가 "몇 개 지표만 보고 물가 올랐다고 호들갑 떨지 말라"라고 한 발언은 그 시절 그린스펀의 언어와 결이 같습니다.
스터디에서 제가 직접 분석해보니 이 구상은 현실 앞에서 꽤 날카로운 벽에 부딪힙니다. 1998년 8월 국제유가는 배럴당 8달러였습니다. 그때 그린스펀이 기술 혁명을 믿으며 금리를 동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자재 가격이 바닥에 붙어 있었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국제유가는 100달러를 넘나들고 있고, 세계화 대신 반세계화(deglobalization)의 흐름이 공급망 비용을 구조적으로 높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반세계화란 각국이 자국 산업 보호와 공급망 내재화를 이유로 글로벌 분업 체계에서 이탈하려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두 조건만 봐도 90년대처럼 기저 인플레이션이 얌전히 눌려 있을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워시가 그린스펀의 청사진을 그리기 어려운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유가 환경의 구조적 차이: 당시 배럴당 8달러 vs 현재 100달러 이상
- 세계화 → 반세계화로의 패러다임 전환
- 코로나 이후 급증한 국채 잔액과 재정 부담
- 양적완화(QE) 17년치 대차대조표 축소의 현실적 어려움
채권금리가 내려오지 않는 진짜 이유
매일 저녁 계단 오르기를 합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이 복잡한 매크로 방정식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몸으로 느끼는 그 무게감이 채권 시장이 받고 있는 압력과 묘하게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4.3% 아래로 잘 내려오지 않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쟁이 끝나더라도 인플레이션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채권 시장의 판단입니다. 주식 시장은 "전쟁은 결국 끝날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반도체 같은 섹터에 자금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원유 선물 시장도 1년 후 가격을 75달러 수준으로 보며 정상화를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채권 시장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쟁 이후 날아올 청구서 문제입니다. 전쟁 비용은 국채 발행으로 메워질 수밖에 없고, 방위비 증액분만 해도 수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국채 공급이 늘면 채권 가격은 내려가고 금리는 오릅니다. 전쟁이 끝나도 채권 시장에는 반드시 좋은 얘기가 아닌 셈입니다. 실제로 2022년 러우 전쟁 당시 미국 기준금리는 3월 제로(0%)에서 이듬해 5.25%까지 치솟았고, 그때의 빅스텝과 자이언트스텝은 많은 투자자에게 전례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이언트스텝이란 한 번의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75% 포인트 인상하는 조치를 가리킵니다. 당시 저도 그 단어를 실제로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교과서 속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워시가 구상하는 통화정책 프레임워크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양적긴축(QT)과 기준금리 인하, 그리고 금융규제 완화를 동시에 가동하는 조합입니다. 여기서 양적긴축(QT, Quantitative Tightening)이란 중앙은행이 보유 중인 국채나 기타 자산을 매각해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는 정책을 말합니다. 연준이 국채를 팔면 장기 국채 금리가 올라가는 긴축 효과가 생기지만, 동시에 기준금리는 낮춰 단기 금리를 내린다는 구상입니다. 장단기 금리 스프레드(spread), 즉 장기 금리와 단기 금리의 차이가 벌어지면 시중 은행들의 대출 마진이 늘어나고, 규제 완화로 대출 여력을 확보한 은행들이 유동성을 시장에 공급한다는 논리입니다. 직관적으로 들으면 모순 같은데, 설계 자체는 꽤 정교합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봅니다. 연준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가 이미 수십 년에 걸쳐 팽창한 상태에서, 양적긴축을 본격화하면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미국 국채를 매각하는 압력이 커집니다. 그 압력을 통화스와프(currency swap)로 묶어두려 한다는 분석도 있지만, 통화스와프 역시 연준의 대차대조표를 늘리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워시 본인의 지향과 충돌합니다. 통화스와프란 두 나라 중앙은행이 서로의 통화를 교환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협정입니다. 복잡한 방정식이 서로를 물고 도는 구조입니다.
연준의 통화정책 결정 회의인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미국 기준금리는 현재 하단 기준 3.5%입니다. 2022년 제로 금리에서 출발해 빠르게 올린 것과 달리, 이번엔 어느 정도 완충 공간이 있다는 게 연준 입장입니다(출처: 미국 연방준비제도). 그러나 "좋은 위치에 있다"는 말이 정책 결정에서 편안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쟁 종전 시점이 5월이냐 12월이냐에 따라 금리 인상·동결·인하 셋 중 어느 방향도 틀릴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한국은행 역시 2024년 이후 기준금리 운용에서 외부 충격에 대한 불확실성을 핵심 변수로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은행).
과거 주식 시장에서 "밀리면 사라"가 통했던 건 금리 하락이라는 중력이 늘 바닥을 향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력이 작동하던 시절엔 채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경험상 2017년 즈음까지만 해도 채권 시장에서 그 격언은 꽤 믿을 만한 나침반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나침반이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시장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워시가 그린스펀의 레전드를 재현하길 원하더라도, 지금 매크로 환경은 그에게 훨씬 좁은 운신의 폭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부채는 많고, 지정학 리스크는 높고, 대차대조표는 이미 무겁습니다. 모순이 덕지덕지 붙은 판에서 새로운 프레임을 짜려면 설계만큼이나 집행의 신뢰가 중요한데, 초반부터 시장과 행정부 사이에서 좌충우돌할 가능성을 저는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처럼 방향을 잡기 어려운 시장에서 제가 스터디를 통해 다시금 새기게 된 건 하나입니다. 남의 그림을 따라 그리려 하기보다,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데이터 기준과 판단 원칙을 먼저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시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로 움직이는 시장 안에서 제 포지션을 지킬 힘은 결국 저에게서 나와야 하니까요.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결정은 반드시 본인의 판단과 책임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