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을 빨리 통제 가능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능력이라고 믿었거든요. 센터 부원장으로 30여 명을 이끌면서도, 사춘기 두 아들 앞에서도 저는 계속 정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인터뷰를 접하고 나서 그 믿음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재검토하게 되었습니다.
불확실성 수용, 장인의 철학과 현실 사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숙"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관계의 복잡성을 수용하면 심리적 유연성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고, 저도 한동안 그 믿음을 그대로 가져갔습니다.
여기서 심리적 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이란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서도 가치 지향적 행동을 이어가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조직 심리학에서 번아웃 예방과 리더십 효과성에 직접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조직 운영에 적용해 보니, 이 태도가 통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이 명확히 갈렸습니다. 팀원 간 갈등이나 예기치 못한 민원 상황에서는 감독의 말처럼 "뜻대로 안 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실제로 긴장을 낮추고 더 나은 해결책을 끌어냈습니다. 19층 계단을 퇴근길에 오르며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히는 저만의 루틴이 생긴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하지만 투자 판단이나 사업 의사결정 앞에서는 달랐습니다.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것과 리스크를 방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감독이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장인 정신은 존중하지만, 그 논리를 그대로 경영에 가져오면 치명적인 비용 유발 부작용이 생깁니다.
핵심 포인트:
- 관계·창작 영역: 불확실성 수용이 심리적 안전마진(Psychological Safety Margin)을 높임
- 투자·경영 영역: 수용이 아닌 계량화와 프로토콜 설계가 선행되어야 함
- 육아 영역: 두 접근이 동시에 필요하며, 상황별 전환이 핵심
인간 고유성, AI가 아직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감독은 AI와 인간의 경계를 '상상력'에서 찾았습니다. 레몬 나무 한 그루를 보며 죽은 아이를 떠올리는 능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 뒤에서 읽어내는 능력이 아직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공감한 것은 바로 '질문을 품는 태도'였습니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메시지보다 물음(Question)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메시지와 물음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메시지는 이미 답이 정해진 채로 관객을 향해 발신됩니다. 반면 물음은 작품이 끝난 후에도 관객 안에서 계속 자라납니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팀 미팅에서 "이게 답입니다"로 마치는 회의보다, "이 상황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요?"로 마치는 회의가 훨씬 더 긴 여운을 남긴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AI가 잘하는 것은 방대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추출해 최적해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챗GPT에 시나리오 감상을 요청해 봤을 때 "균일화된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감독의 우려는, 제가 업무에서 AI 도구를 써보며 느낀 감각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생성형 AI(Generative AI)는 기존 데이터의 통계적 평균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어서, 평균 이하를 솎아내는 데는 탁월하지만 평균 너머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생성형 AI 도입 이후 창작·기획 직군에서 오히려 '독창성 요구 직무'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균일화의 바다에서 유일성이 희소 자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리스크 관리, 낭만적 복잡성에 매몰되지 않는 법
일반적으로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받아들이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명제는 창작이나 인간관계에서는 꽤 유효합니다. 감독 스스로도 촬영 당일 하늘이 흐려졌을 때 "이쪽이 더 흥미로울 수 있겠다"라고 전환하는 것이 영화를 더 좋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 감각이 뭔지는 압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BTS(Break-The-System) 투자 관점에서 보면,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태도가 스톱로스(Stop-Loss) 설정 없이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으로 왜곡될 때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여기서 스톱로스란 특정 손실 수준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포지션을 청산하는 사전 약정 손절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낭만적 수용이 아닌 냉정한 시스템 설계의 영역입니다.
2024년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개인투자자 손실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손실을 키운 가장 큰 행동 요인은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Bias)으로 인한 손절 지연"이었습니다(출처: 금융감독원). 손실 회피 편향이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을 약 2배 더 크게 느끼는 인지 왜곡으로, 이 때문에 손절해야 할 타이밍에 "조금 더 기다리면 회복될 것"이라는 감정적 수용이 발동됩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철학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삶의 모든 영역에 균일하게 적용하지는 않겠다는 쪽입니다. 관계와 창작에서는 질문을 품고 불완전함을 자양분으로 삼되, 수치와 계약이 오가는 자리에서는 예측 실패 비용을 엄격히 계량화하고 명확한 프로토콜로 교차 검증하겠습니다.
결국 이 두 태도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디서는 수용하고, 어디서는 숫자로 검증하는가"를 구분하는 메타인지(Meta-Cognition)가 진짜 성숙의 핵심일 수 있습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의 사고 과정 자체를 인식하고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감독이 레몬 나무에서 아들을 보는 상상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저는 매일 숫자 앞에서 달걀을 돌려보며 삶은 달걀과 생달걀을 구분하는 훈련을 계속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