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k라는 제도를 처음 알게 된 날 나의 노년을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부모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부동산을 통해 노후를 대비해야만 하지만 너무 힘든 일이라 손 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 직장인 중 절반 정도만이 퇴직연금 제도에 실제로 가입해 있습니다.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우리 센터 직원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관리자 입장에서 직원 복지를 챙기다 보면, 좋은 제도가 있어도 '알아서 하겠지'라는 안일한 전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SECURE Act 2.0이 바꾼 것들
2022년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SECURE Act 2.0은 퇴직연금 자동 가입 의무화를 골자로 합니다. 여기서 SECURE Act 2.0이란 2019년 제정된 은퇴 준비 강화법(SECURE Act)을 대폭 개정한 후속 입법으로, 신규 설립되는 401k 및 403b 플랜에 자동 가입 기능을 의무화한 것이 핵심입니다. 401k란 미국의 대표적인 확정기여형 퇴직연금 제도로, 우리나라의 DC형 퇴직연금과 유사한 구조입니다.
이 법에 따르면 새로 만들어지는 플랜은 신규 직원이 자격 요건을 충족하는 즉시 자동으로 가입 처리되며, 첫 기여율은 급여의 3%에서 시작해 매년 1%씩 자동으로 올라가 최소 10%, 최대 15%까지 적립됩니다. 자동 증액(auto-escalation)이란 직원이 별도로 요청하지 않아도 기여율이 해마다 자동으로 높아지는 구조를 말합니다. 저처럼 바쁜 워킹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특히 반갑습니다. 재테크 카페에서 공부한 내용들을 실생활에 적용하려 해도, 두 아이 육아와 센터 업무를 병행하다 보면 연금 계좌 설정을 바꿀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다만 이 규정이 모든 곳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 시행 이후 새로 만들어진 플랜에만 적용되며, 기존 운영 중인 플랜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또한 다음 경우는 의무 적용에서 제외됩니다.
- 직원 수 10명 이하의 소규모 사업체
- 개업 후 3년 미만의 신생 사업체
- 교회 및 정부 기관이 운영하는 플랜
센터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직원 규모가 30여 명인 저희 같은 곳은 이 제도의 직접 적용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방향의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인사 담당자로서 미리 구조를 파악해 두는 것이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동 가입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일반적으로 퇴직연금 제도는 '있으면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저는 직원들과 근로계약을 갱신하면서 다른 현실을 봐왔습니다. 당장의 생활비가 빠듯한 직원들에게 "은퇴 자금을 미리 적립하세요"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교육이 부족하거나 재정적 여유가 없는 경우, 자발적 가입 제도만으로는 참여율을 높이기 어렵습니다.
자동 가입 구조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기본 자동 기여 약정(ACA, Automatic Contribution Arrangement)은 직원이 별도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기본 비율로 자동 적립됩니다. 여기서 ACA란 가입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어 탈퇴를 원하는 경우에만 별도 신청이 필요한 구조를 말합니다. 그보다 한 단계 발전된 것이 적격 자동 기여 약정(EACA, Eligible Automatic Contribution Arrangement)으로, 최초 자동 가입일로부터 90일 이내에 기여금을 인출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적격 자동 기여 약정(QACA, Qualified Automatic Contribution Arrangement)은 IRS의 차별금지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로, 고용주 기여 일정과 특별 권리 확정 일정이 함께 포함됩니다. 여기서 IRS 차별금지 테스트란 퇴직연금 플랜이 고소득 직원에게 지나치게 유리하지 않은지 여부를 판단하는 미국 국세청의 연간 심사를 의미합니다.
프린시펄 파이낸셜 그룹이 자동 가입 플랜 참여 경험자 2,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4%가 자발적 가입 방식보다 자동 가입 덕분에 더 일찍 은퇴 저축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답했습니다(출처: Principal Financial Group). 저는 이 수치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행동은 기본값을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고, 복잡한 결정을 미루는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복리 효과를 '시스템'으로 강제하는 이유
지수는 장기적으로 우상향 한다는 전제하에, 복리(compound interest)의 힘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여기서 복리란 원금뿐 아니라 이미 쌓인 이자에도 다시 이자가 붙는 구조로, 투자 기간이 길수록 자산 증가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집니다. 문제는, 이 원리를 머리로는 알아도 실천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저도 ETF 등 자산 배분에 나름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솔직히 업무가 몰리는 시기에는 퇴직연금 계좌를 수개월째 들여다보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적금은 원금만 보존될 뿐 물가상승률을 이기지 못하고, 부동산은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매달 시장을 분석하며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기엔 현실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자동 가입과 자동 증액 시스템의 진짜 역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뱅가드 인베스트먼트가 2021년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자동 가입 제도는 고용주 비용을 다소 증가시키는 측면이 있지만 저임금 근로자들의 퇴직연금 참여율을 끌어올려 결과적으로 비용 증가폭을 상쇄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됩니다(출처: Vanguard Research). 의지가 강한 사람만 노후를 잘 준비하는 사회가 아니라, 시스템이 자동으로 최소한의 안전망을 만들어주는 방향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우리 가족의 퇴직연금 계좌가 실제로 자동화 관점에서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혹시 방치된 자산은 없는지 직접 점검해 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 경험상, 아는 것과 실제로 확인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훨씬 멀었습니다.
노후 자산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구축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 복리의 마법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 미국의 SECURE Act 2.0은 그 방향을 법으로 명문화한 사례입니다. 아직 자신의 퇴직연금 계좌 기여율이나 자동 증액 설정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으셨다면, 오늘 딱 10분만 투자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 10분이 20년 뒤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 조언이 아닙니다. 퇴직연금 관련 구체적인 결정은 전문 금융 자문사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https://seekingalpha.com/article/4502100-401k-automatic-enroll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