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비중을 14.4%에서 20.8%로 높인 시점은 올해 초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한 분기 평가 손실이 182조 원에 육박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솔직히 처음엔 그냥 숫자가 크다는 인상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 언제, 왜 내려졌는지를 뜯어보기 시작하니 이게 단순한 투자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기금 운용 원칙이 흔들린 흔적이 곳곳에 보였고, 그 여파가 국내 증시의 고질적인 저평가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국민연금과 거버넌스: 원칙이 흔들릴 때 생기는 일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비중을 단기간에 끌어올린 배경을 살펴보면, 기금 운용의 핵심 원칙인 수익성과 안전성보다 다른 무언가가 먼저 작동했다는 의심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원래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비중을 꾸준히 줄여 오는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글로벌 자산 배분 차원에서 보면, 한국 증시가 전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에 불과한데 국민연금은 그 14배가 넘는 비중을 국내 주식에 할당하고 있었거든요(출처: 국민연금공단).
그런데 올해 1월 기금운용위원회는 국내 주식 목표 비중을 14.4%에서 14.9%로 소폭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5월에 다시 20.8%로 대폭 상향했습니다. 여기서 기금운용위원회(Fund Management Committee)란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로, 자산 배분의 큰 틀을 결정하는 곳입니다. 전략적 자산배분(SAA)과 전술적 자산배분(TAA)을 합산하면 국내 주식을 최대 28.8%까지 담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는데, 제가 이 수치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비중을 늘린 게 아니라 팔지 않아도 되는 상한선을 맞춘 것 아닌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국내 주가가 지수 5,000선 부근까지 빠지는 상황에서도 국민연금은 비중이 여전히 20%대 중반을 유지하고 있어 추가 매수도, 매도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습니다. 리밸런싱(Rebalancing)이란 목표 비중에서 벗어난 자산을 다시 목표치에 맞게 사고파는 작업인데, 이 기능이 마비된 셈입니다. 시장이 급락하는 날에도 국민연금의 자동 안전판 역할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는 소액 투자자에게도 직접적인 손실로 이어집니다. 저도 퇴근 후 계좌를 확인할 때마다 이 부분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더 석연찮은 부분은 회의록 공개 시점입니다. 국민연금은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록을 원칙적으로 1년 뒤에 공개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1월과 5월 두 차례 문제가 된 회의의 회의록은 최장 4년 비공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년 뒤 공개하면 현 정부 임기 중에 내용이 드러나고, 4년 뒤라면 정권이 바뀐 다음입니다. 이 타이밍이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저만의 감상이 아닐 겁니다.
국민연금 수익률 1% p의 무게
기금 고갈 문제를 두고 '더 내고 덜 받는' 구조 개혁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익률 개선이 고갈 시점을 얼마나 늦출 수 있는지 수치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 수익률 1%p 향상 시 기금 소진 5년 연장 — 정부 제5차 재정 추계(2023년 기준)
- 수익률 1%p 향상 시 기금 소진 7년 연장 — 정부 2026년 업무보고 기준
- 수익률 1%p 향상 시 기금 소진 13년 연장 — 국회예산정책처 분석(출처: 국회예산정책처)
고통스러운 모수 개혁 없이도 수익률만 올리면 수십 년을 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금 운용 원칙이 흔들리는 것이 단순한 투자 실패를 넘어 미래 세대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아이들 대학 등록금을 모은다고 생각하고 지켜보는 입장에서, 이건 남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요약: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 급상향은 기금 운용 원칙보다 시장 개입 의도가 앞선 결정으로 의심되며, 회의록 4년 비공개 결정은 투명성 훼손의 증거입니다.
주주권익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제도가 바뀌어야 체질이 바뀐다
국내 증시가 저평가되는 이유를 두고 산업 경쟁력 부족, 지정학적 리스크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됩니다.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재테크를 공부하면서 가장 납득이 안 됐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업을 골라 투자해도 오너의 결정 하나로 주주 가치가 훼손되는 구조 자체였습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란 한국 증시의 주가가 글로벌 동종 기업 대비 낮게 평가받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 원인의 상당 부분은 거버넌스(Governance), 즉 기업 지배 구조의 불투명성에서 비롯됩니다.
최근 불거진 가스공사와 석유공사 통합 사례는 이 문제를 날것으로 보여줬습니다. 정부가 두 공기업을 합병한다고 9월 발표했는데, 가스공사 사장이 발표 당일 아침에 전화 한 통으로 통보받았다고 국감에서 직접 밝혔습니다. 가스공사는 상장사입니다. 상장사의 합병은 기존 주주의 권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CEO조차 당일 통보를 받았다는 건, 이 결정 과정에서 주주 보호 절차가 아예 없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석유공사는 완전 자본잠식 상태입니다. 자본잠식(Capital Impairment)이란 누적 손실이 커져 자본금을 갉아먹은 상태로, 쉽게 말해 빚이 자산을 초과한 기업입니다. 이런 회사와 상장 기업을 합병하면 기존 주주가 입는 손실은 명백한데,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아직도 제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솔리다임 중복 상장 이슈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복 상장(Double Listing)이란 이미 상장된 모회사의 자회사를 별도로 상장시켜 모회사 주주의 이익이 희석되는 구조를 말합니다. SK하이닉스의 자회사 솔리다임이 미국 증시 상장을 추진한다는 정황은 꾸준히 흘러나왔지만, 정작 회사는 주주들에게 구체적인 설명 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주 총회를 통해 충분한 보호 장치를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먼저여야 한다는 건, 제가 직접 투자자로서 발을 담가봤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 주주 가치 보호 문화가 예전보다 많이 개선된 건 사실입니다. 일감 몰아주기를 29.9%로 맞춰 규정을 피하던 관행이나, 유상증자 공시 하나 던지고 끝내던 시절과 비교하면 분명히 달라진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좋아진 부분을 인정하는 것과, 지금 이 상태로 충분하다고 보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선의와 시장 자율에 기대는 방식은 한계가 있고, 상법 개정과 같은 강제력 있는 법적 주주 보호 장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례는 계속 반복됩니다.
요약: 가스공사 합병 기습 통보, 솔리다임 중복 상장 추진 등은 주주 보호 절차가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거버넌스 개선은 선의가 아닌 법적 강제력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팔면 주가가 떨어지는 건데 왜 팔아야 하나요?
A.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밸런싱이란 목표 비중을 지키기 위한 규칙적인 조정 작업으로, 이 원칙이 흔들리면 급락 장에서 국민연금이 시장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할 때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됩니다. 실제로 현재 국내 주식 비중이 목표치를 한참 웃돌고 있어, 추가 매수 여력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입니다.
Q. 자회사 중복 상장이 왜 소액주주에게 문제가 되나요?
A. 단순히 이익을 나눠 갖게 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의 성장 가치를 온전히 누리던 구조에서, 자회사가 별도 상장되면 그 가치의 일부가 새로운 주주에게 넘어갑니다. 이 희석을 상쇄할 주주 환원 계획이 없는 채로 상장이 추진된다면, 기존 소액주주는 아무런 보상 없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Q.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려면 뭐가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하나요?
A. 기업 지배 구조, 즉 거버넌스 개선이 핵심입니다. 주주 총회 결의 없이 대규모 합병을 진행하거나, 소액주주 보호 장치 없이 자회사를 상장시키는 관행이 법적으로 차단되지 않는 한, 외국인 투자자와 장기 투자자들이 신뢰를 갖고 국내 증시에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시장 개입이나 수급 조정보다 법적 강제력이 먼저입니다.
Q. 국민연금 회의록을 4년 뒤에 공개한다고 하는데 왜 문제인가요?
A.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록은 원칙상 1년 뒤 공개가 기본입니다. 예외적으로 금융시장 안정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한해 최장 4년까지 유예할 수 있는데, 이번에 문제가 된 두 회의의 결정은 그 예외 조항을 적용했습니다. 4년이 지나면 정권이 교체된 이후라는 타이밍과 맞물려, 의사 결정 과정에 외부 압력이 있었는지를 검증하기 더 어려워진다는 점에서 투명성 우려가 나오는 겁니다.
결론
국내 증시의 저평가 문제는 단순히 주가가 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금 운용 원칙이 흔들리고, 상장사 CEO가 합병 결정을 당일 아침에 통보받는 일이 반복되는 한, 아무리 주가 부양 정책을 꺼내 들어도 근본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재테크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건, 좋은 기업을 고르는 안목만큼이나 그 기업이 운영되는 제도적 환경을 읽는 눈이 중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장의 시장 수급이나 지수 흐름보다, 상법 개정과 기금 운용 독립성 확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중장기 투자자에게 더 의미 있는 지표가 될 겁니다. 국민연금 수익률 1% p가 기금 소진을 최대 13년 늦출 수 있다는 수치는, 지금 이 원칙 논쟁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다시 한번 가늠하게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rEZG3oTz8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