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트에서 장을 보다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두 번 놀란 적 있으신가요? 저는 요즘 그게 일상이 됐습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 선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으면서, 그 충격이 고스란히 식탁물가와 공공요금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수치로는 이해해도 피부로 닿는 무게는 전혀 다릅니다.
유가가 내려오지 못하는 진짜 이유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통행이 불안정해지면서 원유 공급망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호르무즈 해협이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좁은 바닷길로, 전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20% 가까이가 이 길목을 통과합니다. 이 해협의 긴장이 높아질수록 유가의 하방 경직성, 즉 가격이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성질이 강해집니다.
IEA(국제에너지기구)와 EIA(미국에너지정보청)의 보고서에 따르면 3, 4분기에 원유 공급 부족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페르시아만 지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약 1,450만 배럴 수준이 줄어든 상태이고, 유가 선물 곡선의 원월물, 즉 12개월 이후 인도 예정인 계약 가격도 배럴당 70달러 후반에서 80달러 초반대에 걸쳐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단순합니다. 전쟁 이전 수준으로 유가가 되돌아오기는 구조적으로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가스비 고지서를 떠올렸습니다. 작년 이맘때보다 분명히 올랐는데, 정작 뉴스에서는 "물가 지표가 예상보다 양호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괴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물가 지표와 현실 사이의 간극
미국의 3월 CPI(소비자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0.9% 상승했습니다. CPI란 일반 가계가 소비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 변동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지표입니다. 전쟁 이전 평균 상승폭이 0.1~0.3%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결코 작은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시장 예상치를 하회했다는 이유로 "양호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선도 계약 효과가 꼽힙니다. 원유 선물 거래에서 3개월 이내의 근월물 거래량이 전체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3월 유가 급등 이전에 체결된 낮은 가격의 계약들이 아직 반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지금 체감 물가는 올랐는데 공식 지표는 아직 옛날 계약값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구조가 무서운 이유가 있습니다. 고유가 상태로 체결된 4월 계약들이 실제 물가에 반영되는 시점은 6, 7월입니다. 7월입니다. 그 지표가 공개되는 7~8월, 여름에 미국 인플레이션이 피크를 찍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이게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고, 호르무즈 해협 영향을 일본과 함께 가장 많이 받는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안을 이해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지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CPI: 소비자물가지수, 일반 가계 소비재 가격 변동 측정
- PCE: 개인소비지출 물가지수, 연준이 주목하는 수요 측 인플레이션 지표
- 절사 평균 PCE: 극단치 품목을 제외하고 물가 추세를 측정하는 방식
- 원월물: 원유 선물 중 12개월 이후 인도 계약 가격
고용 시장은 '골디락스', 하지만 오래갈까요
미국의 고용 시장은 현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골디락스 상태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골디락스란 경기가 과열되지도, 침체되지도 않은 이상적인 균형 상태를 뜻합니다. 구인 건수는 줄고 있지만 신규 취업자 수도 함께 줄고 있어서,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감소하며 균형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실업률은 3.8~3.9%대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국 CBO(의회예산처)가 추산하는 자연실업률은 4% 초반대입니다(출처: 미국 의회예산처). 자연실업률이란 인플레이션을 가속시키지 않으면서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업률 수준을 뜻합니다. 현재 실업률이 이 수치보다 낮다는 것은 노동시장이 아직 탄탄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수치를 그대로 낙관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의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4달러를 넘기면서 소비심리가 크게 꺾였고, 소비자심리지수가 전쟁 이후 큰 폭으로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소비가 줄면 기업은 재고를 쌓고, 재고가 쌓이면 고용을 줄입니다. 지표가 괜찮은 지금이, 어쩌면 나빠지기 직전의 조용한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반도체 하나로 버티는 한국 경제의 민낯
올해 1분기 국내 GDP는 전분기 대비 1.7% 성장해 서프라이즈를 기록했습니다(출처: 한국은행). 그런데 성장 기여도를 뜯어보면 순수출이 1.1% 포인트, 내수가 0.6% 포인트입니다. 수출이 거의 두 배의 기여를 한 셈이고, 그 수출의 핵심은 반도체입니다.
같은 국민으로서 반도체 산업이 잘 된다는 소식은 분명 반갑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고용유발계수입니다. 고용유발계수란 특정 산업에서 10억 원어치의 생산이 발생했을 때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 수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한국 전산업 평균이 6~7명 수준인 데 반해, 반도체 산업의 고용유발계수는 2명에 불과합니다. 수출이 아무리 잘 돼도 우리 동네에, 우리 아이들에게 돌아올 일자리가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뜻입니다.
또 반도체 산업은 경기에 대한 베타값, 즉 경기 민감도가 매우 높습니다. 잘 나갈 땐 전체 경제를 단숨에 끌어올리지만, 사이클이 꺾이면 충격도 그만큼 크게 옵니다. 저는 이 구조가 솔직히 두렵습니다. 내수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상태에서 반도체 하나에 의존하는 구조는, 언젠가 그 사이클이 꺾일 때 서민 가정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됩니다. 지금 마트에서 느끼는 물가 부담은 그런 구조적 불균형의 작은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거시 지표가 양호하다는 뉴스와 가계부 숫자 사이의 간극은 앞으로도 당분간 좁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가 선물 곡선이 시사하듯 고유가가 구조적으로 고착된다면, 6~7월 이후 체감 물가는 지금보다 더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가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 예를 들어 변동금리 대출의 금리 변동 시점을 미리 파악하거나 생활비 항목별 지출을 점검해 두는 것이 현실적인 준비일 수 있습니다. 수치 너머의 현실을 읽는 눈을 갖는 것, 그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실질적인 경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재무 결정은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